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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한 때 아시아(그리고 오스트레일리아) 시리즈가 있었다. 

가끔 한국시리즈, 일본시리즈, 그리고 미국의 월드시리즈를 보면서 왜 미국은 자국의 리그 챔피언을 가리는데 '월드 시리즈'라는 거창한 타이틀을 사용하는가에 대한 생각을 해본 이들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처음에는 그저 화려하고 멋지게만 '월드시리즈'를 바라보던 본인 또한 어느샌가 그런 생각을 하기 시작했으니까.

'월드시리즈'라는 타이틀에 대한 불편함, 언짢음도 있지만 한편으로는 한국과 일본 그리고 대만 등의 아시아 권에 있는 프로팀의 수준 차이가 얼마나 날까, 실제로 붙어보면 어떨까하는 궁금증이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팬들의 이러한 궁금증도 있었겠지만 한국의 KBO, 일본의 NPB, 대만의 CPBL, 중국의 CBA, 호주의 ABF가 의기투합혀여 Asia Series를 출범시켰는데 이는 2005년부터 2013년까지의 역사로 짧은 역사를 가지고 아쉬움속에 막을 내리게 되었다.

짧다면 짧은 역사였고 이 아시아 시리즈는 05년부터 07년까지는 일본 코나미社가 타이틀 스폰서가 되어 '코나미컵'이라는 타이틀로 일본 도쿄돔에서, 이후 08년부터 13년사이(09, 10년에는 중단)에는 '아시아 시리즈' 도쿄, 타이중, 부산, 타이중 순으로 개최지역에 변화가 있었다.

중국은 (국가대표팀으로 봐야하겠지만)올스타팀, 한국-일본-대만-호주는 해당 년도 우승팀이 출전하는 형식이기에 아시아 챔피언십 시리즈라고 봐도 무방했던 시리즈였다. 대부분의 우승은 일본 프로팀이 가져갔고, 우리나라에서는 SK 와이번스가 아쉽게 준우승 1회, 삼성 라이온즈가 우승 1회, 준우승 1회의 성적을 거두었다. 일본이 5회 우승을 거두기는 했지만 매해 우승팀이 달라서 2회 이상 우승한 '절대강자(?)'는 없었다. 2009년부터 2년간 시리즈가 중단된 것을 보더라도 이 시리즈는 흥행을 하지 못했고 초기 3년동안 타이틀 스폰서를 했던 코나미가 스폰서십에서 철수 한 이후 적극적으로 스폰서십에 나서는 기업은 없었던 것 같다.

각 리그 챔피언끼리의 격돌이었지만 각 리그의 침피언십에서 전력을 쏟아부었던 팀이 이벤트성 게임으로 흘러갔던, 다소 긴장감이 떨어지는 경기들은 야구팬들에게 김빠진 콜라를 마시는 기분마저 주었던 기억이다. 그러나 그 와중에도 한일간 경기는 꽤 살벌한 분위기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사실 작은 범위로 본다면 초기 움직임으로 한국과 일본의 올스타 팀이 경합하는 한일 수퍼게임이 앞서기는 했다.

 

3.2. 한-일 슈퍼게임

바람의 아들 이종범이 명포수 후루타 아쓰야의 레이저 송구를 뚫고 2루를 훔치고, 국보 선동렬이 일본의 올스타 팀을 상대로 5연속 탈삼진을 잡아내고 리그 대표 거포였던 장종훈이 장외홈런을 때려내던 모습을 기억하는가. 일본에 지면 안된다는 '정신력'이 매우 강하게 작동되던 그 시기였고 승리를 거두기도 했으나 전력차이를 느낄 수 있는 경기들이기도 했다.

한-일 슈퍼게임은 1991년부터 4년 간격으로 1999년까지 세 차례 열렸는데 이는 기존부터 계속 되어왔던 미-일 프로야구 올스타전을 모방한 경기였다고 한다. 모두 일본에서 열렸고 기존 미-일 올스타전을 스폰서했던 요미우리 신문의 흥행 케이스를 보고 이에 대항하여 라이벌 '주니치'신문이 한-일 슈퍼게임을 스폰서했다고 한다.

이 경기를 통해서 한국 올스타 선수들은 좀 더 많은 경험을 할 수 있었는데, 일본 도쿄돔에서의 실내 경기, 일본 투수들의 정교한 제구와 변화구 그리고 그중에서도 포크볼 등이 그것이다. 개인적으로는 첫 수퍼게임에서 2승4패로 열세로 끝났던 것이 무척 분하고 아쉬웠지만, 한편으로는 수퍼게임 시작 전 1승도 어렵다고 했던 평가들이 주를 이뤘던 것을 넘어서서 우리나라 수퍼스타들이 대등한 경기를 하고 2승을 이뤘다는게 멋지기도 했다. 이러한 한-일간의 교류를 통해서 KBO의 수퍼스타들은 한단계 도약을 이뤄낼 수 있었고 선동열, 이종범, 이상훈, 구대성 등 한국의 슈퍼스타들은 대한해협을 건너 '주니치 드래건즈'로, '오릭스 블루웨이브'로 진출 할 수 있었다.(그리고 '삼손' 이상훈 선수는 일본 주니치 드래곤즈에서의 성공적인 커리어를 바탕으로 꿈에 그리던 MLB의 보스턴 레드삭스와 계약했다. 본래 KBO에서 바로 보스턴 레드삭스로 갈 수 있었던 기회가 있었지만 계약 후, 절차에 대해 문제삼은 타 구단들의 목소리때문에 한-미 포스팅 제도가 생겨났고 공개 입찰(?)에서 상당히 낮은 평가를 받은 후, 미국 진출이 무산되었다가 NPB에서의 퍼포먼스로 재검증(?)을 받은 후 마침내 MLB에 입성할 수 있었던 과정은 한국프로야구가 제대로 된 인정을 받지 못했던 시기이기도 했지만 평가절하당한 측면이 있지 않았나 하는 주관적인 생각에 많은 아쉬움이 있던 과정이었다.)

일본의 '선진화'된 야구가 없었다면 우리가 성장할 수 없었다는 얘기를 주 요소로 하고 싶은 것은 아니다.

중요한 것은 한국의 선수들이 일본의 선수들과 경쟁할 수 있는 장이 있었고, 이를 통해 무엇이 부족했는지, 무엇을 보강해야 하는지를 알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한국프로야구가 아닌 바다 건너 리그에서 활약해보고 싶은 욕구가 생겨났다는 것이다. 그리고 일본은 한국의 Top-Level 선수들을 예의주시했고 이들을 거액의 계약금으로 스카우트했고 중계권을 한국에 판매했고 한국의 야구팬들은 일본 NPB를 보게 되었다.

한-일 슈퍼게임은 단순한 양국의 올스타 교류 경기가 아니었다. 새로운 세상이 열렸고 비즈니스가 창출되었다.

생각해보면 일본 입장에서는, 그들의 시각에서는 한 수 아래로 여겨졌던 한국의 프로선수들을 불러들여 경기를 할 필요가 없었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들은 교류하기를 원했고 그들 나름대로의 Risk가 있었겠지만 큰 금액을 들여 선수를 스카우트했다. 특정 나라, 특정 리그에 대한 하대보다 '객관적인 시각', '비즈니스적인 시각'이 우리에게도 좀 더 필요하지 않나라는 관점에서 되짚어볼 부분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3.3. 아시아 야구 리그에 대한 기존의 움직임

아시아 리그 창설에 대한 내용은 새삼스런 내용은 아니다. 이미 이전부터 언급이 많이 되었던 내용이다. 한국야구의 '전설'이자 아직도 활발하게 활동하는 김성근 감독이 일본의 전설이자 세계적인 홈런타자인 왕정치 소프트뱅크 호크스 회장의 요청으로 코치를 코치하는 역할로 소프트뱅크에 합류했을 때에도 왕 회장과 아시아 리그에 대한 논의를 많이 나누었다고 하는 내용은 익히 알려진 사실이다.

풍부한 자금과 강력한 실행력을 갖추며 2000년대의 강자로 군림하면서도 3군 시스템 제도 도입 등의 야구단 시스템의 혁신을 도모하는 소프트뱅크가 주도하는 것이라면 (혼자서만 할 수는 없는 것이 리그, 그것도 아시아 리그이겠지만) 새로운 리그의 창설이 가능하지 않을까 라는 생각이 든다.

 

3.4. 현실적인 어려움과 해결 방안의 모색

한편으로는 여러가지 현실적 난제가 있는 것도 부인할 수 없는 부분인 것같다.

흥행성과 스폰서십, 축구의 아시아 챔피언스리그와는 달리 각 국가 리그별로 봄에서 가을까지 기본 100경기 이상 편성되어 운영되는 페넌트레이스 사이에서 어떻게 아시아 리그를 운영할 것인가, 그리고 우기에 해당하는 시점에 경기를 할 수 있는 인프라가 확보되어 있는지 등이 언뜻 생각해보아도 풀어야할 문제인 것은 분명하다. 첫번째 흥행성과 스폰서십의 경우는 기존 '아시아 시리즈'와 같이 흥행 이슈로,이에 따른 스폰서십에 대한 이슈로 리그 운영의 지속성에 대해 걱정할 수 있는 것도 당연할 것이라 생각한다. 그러나 기존 '아시아 시리즈'의 경우 단기간 치러지기도 했지만 특정 국가에서만 대회가 치러졌다는 것도 저조한 흥행의 원인이 아닐까.

축구와 직접적인 비교는 어려울 수 있겠지만 예선 리그 전만 하더라도 홈, 어웨이 경기를 통해 양쪽 국가의 팀 팬들이 홈 경기에서 응원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면 티켓 판매를 동반한 수익성도 향상될 수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해본다.

두번째로 각 국가별 리그 진행 중인 상황에서 누가 참가할 것인지, 언제 경기를 할 것인지에 대해서도 고민해볼 수 있는 문제가 될 것같다. 이 역시 축구를 생각해본다면 전년도 성적을 기준으로 각 리그별 (모든 팀이 참가할 수도 있겠지만) 상위 몇 개팀을 제한하고 각 리그의 경기 수를 일부 축소하는 것도 방법이 될 수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해본다. 아시아권에서 프로야구리그를 운영 중안 대표 3국의 경기수를 보자면 한국의 경우 144, 일본의 경우 143, 대만의 경우 120 경기를 진행하고 있다. 구체적인 논의를 할 필요가 있겠지만 총 경기수를 120 정도로 산정한다고 본다면 대략적인 계산 상으로만 본다면 팀당 약20경기 정도 진행할 수 있지 않을까. 2023년도 12월에 대만 타이베이에 새로운 돔구장이 개장함으로서 최소 위 세 국가는 최소 하나의 돔구장은 보유하고 있으므로 우기에도 경기 진행에 문제가 없을 것이다.

축구와는 달리 야구를 하는 나라가 적다는 것이 아시아 리그의 범위에 제한을 둘 수 있는 요소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중동에서도 Baseball United 리그가 출범되었고 이 리그는 UAE, 인도, 파키스탄, 사우디아라비아 4개국이 참여하는 리그이다. 4개의 팀으로 2025년 10월부터 리그를 시작할 예정이지만 UAE의 주도로 메이저리그 레전드 출신들을 운영진 및 선수로 영입했을 뿐만아니라 미국 메이저리그, 마이너리그, 일본 NPB, 여러 나라의 독립리그 등 리그 출신 가릴 것없이 선수들을 영입했다. 정식으로 시작하지 않은 리그 수준을 평가하기에는 섣부르지만 각 팀별로 선수들을 골고루 포진시켰고 크리켓이 절대적인 국민 스포츠인 인도와 파키스탄에도 각각 하나씩 팀을 구성하여 또 다른 국민 스포츠로 흥행을 촉진시키겠다는 목적도 있는듯하다. 중국도 2019년부터 CNBL이라는 명칭과 함께 4개팀으로 프로리그를 출범했다. (코로나 기간동안 중단되었다가 2023년부터 리그가 재개되었다고 한다.) 이를 생각해본다면 초기 아시아 리그에 포함될 수 있는 범위로서는 작지는 않게 보여진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부분은 이 리그를 어느 조직, 어느 기관에서 주도할 것인가 하는가가 아닌가 생각한다. 축구와 동일한 관점에서 생각할 수는 없겠지만 기존의 BFA(아시아 야구 연맹)의 주도 형식으로 갈 것인가, 아니면 각 국가 리그간 합의를 통해 리그 조직을 구성해 주도해 갈 것이냐 하는 부분은 실질적이고 세부적인 논의가 필요한 부분이 될 것으로 생각한다. 아시아 시리즈가 실패했던 이유는 스폰서에 의존성이 너무 컸던 것과 합의를 했다고는 하지만 주도권을 일본 NPB 조직에서 가져가려다가 실패한 것은 아닌가 하는 주관적인 추측을 해본다. 아시아 야구 리그를 아시아 대륙에 전파하고 리그가 견고하게 지속성을 가지게 되고 흥행이 되기 위해서는 특정 국가, 특정 그룹의 이익이 최우선이 된다면, 투자효율성 측면에 주된 초점을 맞춘다면 어려움이 있지 않을까 하는 개인적 견해이다. 그래서 연합체로서 리그 구성단체를 만드는게 중요한 요소가 되지 않을까 한다.

 

아시아리그에 대한 아이디어가 새로운 것은 아니다. 주관적인 견해가 많기 때문에 실질적인 접근에 있어서는 아주 많은 난제가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그렇지만 복잡한 실타래를 (이미 보이지 않는 곳에서 노력 중일 수 있겠지만) 하나씩 풀어나가는 노력을 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미국과 캐나다 팀끼리의 '월드시리즈'가 아닌, 진정한 '월드시리즈'가 되어갔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축구는 공 하나만 있으면 즐길 수 있다는 얘기들을 많이 한다. 어렸을 적을 생각해보면 그 때에도 글러브 없이, 방망이 없이 테니스공과 맨손으로 '주먹야구'를 했다. 그리고 지금은 베이스볼5라는 명칭으로 세계화를 진행하고 있다. 우리도 세계화를 꿈꾸고 도전해보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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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한국에서의 육성 외국인 선수 제도

 

1군에서만 운영되던 외국인 제도가 앞서 얘기했던 것처럼 2023년도부터 KBO는 각 팀별로 투수, 야구 각 1명씩 연봉 30만 달러 제한으로 보유할 수 있도록 규정을 개정했으나 실효성이 없다는 이유로 각 팀에서는 외국인 육성선수를 영입하지 않았다. 국내에서는 대체 외국인 선수로서의 육성형 외국인 선수는 '육성'보다는 '즉시전력감'이어야 하는데 인당 30만 달러를 사용해서 재능있는 선수를 발굴하는 것은 어려움이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개인적인 생각을 해본다.

외국인 선수 영입시 성장보다는 즉시전력감을 우선시하는 한국에서는 기아타이거즈가 2021년 일본계 브라질 투수인 보 다카하시를 영입했었고, 키움 히어로즈가 '성장' 과 '가성비' 측면에서 외국인선수를 영입하는 케이스를 종종 선보였는데 그 중의 하나가 2023 시즌중 대체선수로 8만5천달러에 영입된 로니 도슨 선수이다.

 

2.2. 일본의 육성형 외국인 선수 제도

 

대한민국의 국보 '선동렬' 감독이 주니치 드래곤즈와 계약 하던 시점보다 조금 앞선 1995년 가을 일본 야구, 아니 일본의 자존심이라 불리우는 요미우리 자이언츠에서는 고려대학교 에이스였던 조성민 선수를 8년간 계약금 1억5천만엔에 아마추어 자유계약으로 영입했다. Rising Star와 국보의 일본 진출은 한국 야구의 우수성을 일본에 얼마나 알릴 수 있는지 많은 기대감을 가지게 했다. 그러나 현미경 야구라 불리우던 일본프로야구 무대에서 두 투수는 각각 부상과 부진으로 2군에 머무는 시간이 길었고 이 둘을 대체할 각 팀의 외국인 선수는 넘쳤다. 특히 요미우리 자이언츠는 1군에서의 외국인 선수 보유한도를 넘어서는, 좋은 기량을 가진 외국인 선수와 계약하고 부진하다 싶으면 가차없이 2군으로 내려버리곤 했던 것을 기억한다. 다행히 1997년부터는 선동렬 선수가 나고야의 태양으로 우뚝 서게 되었고, 조성민 선수는 중간과 마무리를 오가며 ERA 2.89 방어율로 데뷔 후 1998년 중반 올스타 전에서의 무리한 투구로 인한 부상이 발생하기 전까지 젊은 에이스로 급부상했다. 두 선수가 2군에서 절치부심했던 1996년 데뷔시즌은 한국 야구팬에게는 큰 충격이었다. 마치 무너지지 않을 것만 같았던 성벽이 무너지는 느낌이 들면서 한국과 일본의 야구 수준이 이 정도인가 절망감이 들기도 했고 또 다른 한편으로는 거액을 들여 영입한 외국인 선수를 가차없이 2군으로 내치고 2군에 있던 외국인 선수를 콜업하던 상황이 충격이었다. 이후 KBO 레전드급의 투수였던 정민태, 정민철 선수가 요미우리 자이언츠에 입단한 후에는 영문모를 가차없는 2군행이 있었다. 이것은 NPB의 외국인 선수 보유한도에 기인한 것인데 1군은 각 팀별로 4명까지 엔트리에 등록할 수 있지만 보유 선수의 수는 제한을 두지 않기 때문이다. 강력한 자금력을 바탕으로 스타FA 선수들을 '수집'하던 '악의 제국' 요미우리 자이언츠도 육성형 외국인 선수 선발에 공을 들이고 있다. 최근에는 체코 국가대표 4번타자로서 2023년 WBC에서 강한 인상을 주었던 Marek Chlup 선수와 2024년 가을 육성 선수 계약을 체결했는데 가을 마무리 훈련을 거쳐 2025년 스프링캠프 1군 시범경기에도 출전한 이 선수는 큰 체구를 바탕으로 한 강한 타격으로 큰 인상을 주고 있다. (야구의 변방으로 여겨지던 유럽의 체코 야구대표팀은 국제대회에서 인상적인 성장세를 보여주고 있는데 이는 일본과의 다양한 교류도 큰 역할을 했다고 개인적으로 생각한다.)

 

2.3. 또 다른 형태의 육성 모델 - 히로시마 카프의 도미니칸 야구 아카데미의 예

 

한국과 유사한 형태로서 모기업의 풍부한 자금력을 바탕으로 한 요미우리와 주니치와는 달리 재정적으로 넉넉하지 못한 '시민구단'(명목상으로는 MAZDA가 모기업이지만 마츠다 가문에 의해 경영되는 개인소유 구단 체제이며 구단 경영에 개입하지 않는 것으로 알려져있다.) 히로시마 도요 카프는 1990년부터 도미니카에 야구 아카데미를 설립 및 운영하면서 젊은 유망주들을 스카우트하고 훈련시켜 일본에서 데뷔시키려 노력했다. 이를 통해 발굴한 선수들이 CARPS를 통해 일본프로야구에 데뷔 후, 메이저리그로 진출하여 레전드 커리어를 만들어내기도 했다. 대표적인 선수들로 뉴욕 양키즈와 시카고 컵스에서 활약한 '올스타' 알폰소 소리아노, 2005년 '월드시리즈 위너' 티모 페레즈, 해당 아카데미 출신 첫 NPB 외국인 선수이자 보스턴 레드삭스에서 메이저리그 커리어를 경험한 로빈슨 체코가 있다. 재정이 넉넉치 않기에 선택한 결정이지만 도미니카와 일본의 야구 교류의 성공 모델이기도 하다. 30여년이 지난 지금도 이러한 노력은 계속되고 있다.

 

2.4. 육성형 외국인 제도에 대한 시각의 변화가 필요한 시점

 

KBO에서 (히어로즈를 제외한)모기업의 지원을 통한 야구단 운영은 여전히 흑자 구조를 달성하기에는 어려움이 많은 것같다. (물론 야구장 사업권 등의 운영 주체가 시정부기관으로 야기되는 말도 안되는 행정적 요소가 크다고 생각한다.) 초창기 프로야구에 비한다면 스포츠 마케팅 부분으로서, 구단 수익 창출 부분으로서 큰 성장이 있었다는 것을 부인하지는 않는다. 다만 한국에서는 여전히 외국인 선수에 대한 시각이 '즉시전력감', '효율성'에 가장 큰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는 것이다. 일본 야구는 한국 뿐만 아니라 특히 대만에 대해서 '시장'으로 접근하는 부분이 크다고 보인다. 앞서 언급했던 바와 같이 NPB의 중계권을 대만 방송사에 판매하고, 대만의 전도유망한 아마추어 선수를 스카우트해서 육성하고 1군에 데뷔시킨다. 자국의 선수를 응원하기 위해 대만에서는 일본으로 '야구여행' 상품을 판매한다.

아시아를 넘어 유럽을 대상으로도 그렇다.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육성형 외국인 선수인 Marek 선수가 1군에 데뷔하고 주축선수로 활약하게 된다면 체코의 야구팬들의 일본야구에 대한 로열티는 매우 높아지지 않을까. 요미우리 자이언츠 팬이 아니라 Marek 선수 자체에 대한 팬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이 선수를 보기 위해 체코 팬들이 비행기를 타고 도쿄로 야구여행을 오고, 도쿄돔의 자이언츠 스토어에서 Marek 선수의 유니폼과 굿즈를 사고, 요미우리를 응원하고, 체코에 NPB 중계권이 판매되고, 체코 야구팬들이 NPB를 시청한다면 이는 무엇을 의미하게 되는 것일까.

우리나라 KBO와 각 팀의 담당자들이 몰라서 위 일본과 같이 시도해보지 않는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현장에서의 '벽'이 존재할 것이라 생각한다. 그러나 그 '벽'이 허물어지고 작은 움직임이더라도 우리나라도 시장을 넓히는 시각에서라도 외국인 선수 제도, 특히 육성형 외국인 선수 제도에 대해 접근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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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외국인 선수 제도 이전의 해외교포 선수 제도

 

한국프로야구가 시작된 1982년 시즌 이후, 1983년부터 해외교포 선수 제도를 통해 NPB(일본프로야구) 출신의 선수들이 각 팀별로 할당되었는데 이는 한국프로야구의 태동에 큰 역할을 한 장훈씨의 역할이 컸다고 한다. 이 장훈씨의 노력과 중재로 요미우리 자이언츠 에이스였던 김일융, 히로시마 도요 카프의 장명부 등의 재일교포 선수들이 팀의 주축으로 뛰며 초창기 한국프로야구의 수준을 높이는데 일조했다. 그리나 1995년부터 교포선수의 팀당 보유 제한을 두면서, KBO의 수준이 점차 높아지면서 교포 선수들이 한국에 오는 일이 드물어지게 되었다.

 

1.2. 외국인선수 제도의 시작

 

1998년 시즌부터 팀당 최대 2명까지 외국인선수를 보유할 수 있었는데 구단 운영에 '효율화'를 추구했던 쌍방울 레이더스는 0명, 해태 타이거즈는 1명을 고용했다. 2001년 시즌부터는 최대 3명까지 보유할 수 있도록 개정이 되었고 대부분 2명은 투수, 1명은 타자를 영입하는 것이 일반적이었고 대체적으로 미국, 중남미 국가 출신 선수 순으로 선호도가 높았다. 아시안으로서는 일본, 미국(시카고 화이트 삭스에서 월드시리즈 우승까지 경험)을 거쳐 히어로즈에서 잠시 뛰었던 다나카 신고, NPB에서 선발투수로 준수한 활약을 하다가 삼성 라이온즈, SK 와이번스에서 뛰었던 카도쿠라 켄, 미국에서 프로 데뷔하여 MILB와 MLB를 이동하다가 NC 다이노스에서 풀타임 선발로 뛰었던 왕웨이중이 대표적인 선수였다.

 

1.3. 육성형 외국인 제도 및 아시안쿼터의 시작

 

2021년 가을 KBO 이사회를 통해서 육성형 외국인 선수 제도를 신설하여 2023년도부터 투수와 야수를 1명씩 최대 연봉 30만 달러를 제한으로 둘 수 있다는 것인데 각 팀은 육성형 외국인 선수를 영입하지 않았다.

이 제도의 실행의 최대 목적은 1군 등록 외국인 선수의 급격한 기량하락 혹은 부상 발생시 빠르게 교체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2024년 SSG 랜더스와 두산 베어스에서 단기 외국인 선수로 활약한 시라카와 케이쇼 선수 이후 2025년 준비기간을 가진 후 2026년부터 시행 예정인데, 그 조건은

- 연봉 총액은 20만 달러

- 기존 외국인 선수 제한과 별도로 하며 직전(혹은 해당년도) 아시아리그 소속 선수이면서 아시아 혹은 호주 국적 선수라고 한다.

 

1.4. 아시아쿼터의 범위 조정이 필요하지 않을까

 

일본 독립리그 출신의 시라카와 케이쇼 선수의 등장 이후 각 팀들은, 그리고 팬들은 일본 독립리그 출신도 KBO에서 통하는구나 하는 생각을 가진 것같다. 그러나 아시안쿼터가 가동되면 일본, 대만 출신보다는 호주 국적의 선수들을 스카우트 하려는 움직임이 이미 발생하고 있다. 월드컵 예선으로 생각해본다면 호주도 아시아로 생각할 수 있겠지만 FIFA가 정한 기준이 맞느냐 하는건 별개의 문제아닌가 한다.

호주를 포함하는 것이 진정한 아시아쿼터인가? 단지 외국인 용병 슬롯을 하나 더 추가하는 것과 다를게 무엇인지? 아시아쿼터는 왜 탄생했나에 대해 의문점을 가져본다.

개인적인 의견이기는 하지만 아시아쿼터가 잘 사용된다면 시장의 확장도 가능하리라 생각해본다. 물론 일본 NPB 혹은 독립리그 출신이 영입된다고 일본까지 영향력이 급격하게 확산되기는 어렵겠지만 최소 대만으로는 영향력이 끼칠 수 있지 않을까.

 

1.5. 한국과 일본의 시각 차이와 시장의 확장

 

육성형 용병, 아시아 쿼터에 대한 한국의 접근은 비전문가인 개인이 보기엔 '즉시전력감'이 최우선 사항으로 보인다. 반면 일본은 재능있는 아마추어 선수를 미리 스카우트 후 2,3군에서 '키우고' 1군에서 데뷔 후 활약할 수 있는 토대를 만드는데 치중하는 것으로 보인다. '국보' 선동열 감독이 주니치 드래곤즈로 진출하기 전부터 주니치의 간판타자로 활약했던 다이호, 세이부 라이온즈에서 활약한 슈밍치에, 야구로 일본으로 유학을 가서 닛폰햄 파이터즈 지명 후 FA로 일본의 자존심이라 불리는 요미우리 자이언츠에 입단 및 활약한 양다이강, 일본 주니치 드래건스에서 데뷔하여 미국 메이저리그 볼티모어 오리올스, 마이애미 말린스를 거치면서 FA로 4년간 8천만달러라는 빅딜까지 성사했던 천웨인 등 많은 선수들이 있다. 이들의 일본 진출 후, 대만의 야구 팬들은 일본에서 활약하는 자국 선수들을 응원하기 위해 일본으로 야구여행을 오가고, 기존에도 긍정적이었던 대만의 일본에 대한 호감도는 여전히 높다. 대만 프로 리그인 CPBL의 4할 타자 왕보룽 선수가 닛폰햄 파이터즈에 입단 후에는 일본 퍼시픽리그에 대한 중계권을 FOX Sports Taiwan이 계약하며 NPB는 중계권료 수익도 얻을 수 있었다. 일본은 80년대 아니 그 이전부터 자국 선수 뿐 아니라 외국 선수, 그중에서도 아시아권 선수 스카우트에 정성을 쏟았다. 한국에 프로야구가 태동하기도 훨씬 전에 경동고등학생 신분이던 백인천 감독을 도에이 플라이어즈에서 스카우트했고 1975년 백인천 감독은 타격왕을 거머쥐며 팀에 공헌했다.

즉시전력보다도 단지 선수 자체의 잠재력을 보고 스카우트했었고 지금도 그런 기조가 이어져오고 있는 것같다.

우리나라에서는 대만 선수의 영입을 타진한 적이 있다고 한다. 2010년 SK 와이번스에서 판웨이룬을, 2015년 모 팀에서 린즈셩(방콕 아시안게임에서 박찬호 선수에게 홈런을 뽑아낸 선수) 영입에 대한 움직임이 있었으나 성사되지는 못했다. CPBL의 행정도 문제여서 무산되기는 했지만 행정적인 부분에서 KBO와 CPBL이 교류하면서 서로의 진입장벽을 낮추었다면, 대만에서 큰 사랑을 받았던 선수, 대형선수로 성장이 예상되는 선수가 한국에도 진출했다면 어땠을까 라는 아쉬움이 남는다.

 

프로 스포츠는 순위, 성적이 중요한 요소이다. 그러나 한국프로야구가 태동할 때 '어린이에게는 꿈을, 젊은이에게 정열을, 온 국민에게는 건강한 여가선용을'이라는 슬로건을 가졌던 것을 생각해볼 때 어린이와 젊은이 그리고 국민은 대한민국을 포함한 더 넓은 영역으로 생각해보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좀 더 현실적으로 접근하자면 한국도 넓은 시장을 지향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국내 천만 관중 돌파도 좋지만 더 많은 국가에서 한국프로야구의 시청자가 생겨나고 비즈니스가 발생하고 팬이 생겨난다면 더 좋지 않을까? MLB가 추구하는 '세계화'를 '한국 야구'는 할 수 없을까.

그렇게 된다면 대그룹 계열사 중 돈 먹는 하마로 여겨지는 조직에서 흑자 구조를 만들어내는 팀들이 더 많이 나올 수 있지 않을까. 프로야구 팀 자체가 하나의 독립적인 회사로서 설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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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ologue

방 안에서 장난감을 갖고 놀고 책읽으며 혼자 시간을 보내길 좋아하던 한 초등학교 3학년에게 어느 날 프로야구 팀의 멋진 유니폼이 눈에 들어오고 이후 주차장에서 테니스공을 가지고 동네 야구를 하면서 야구라는 스포츠와 사랑에 빠졌다.

운동장 3바퀴도 헐떡거리면서 뛰던, 내성적이고 나약한 체력의 뚱뚱한 한 소년이 야구선수가 되겠다고 선언했을 때 부모님은 물론이고 초등학교 담임선생님, 전문 태권도 선수 경력이 있었던 아버지 의류 공장의 어른도 나에게 '무리'라고 했다. 혈서라는게 뭔지도 잘 모르는 초등학생은 혈서를 쓰겠다며, 단식하겠다며 강하게 의사를 나타냈고 자식이길 것 같았던 부모님도 결국 승낙해서 초등학교 5학년 가을 야구부가 있는 학교로 전학을 가며 약 5년 간의 짧다면 짧은 아마추어 야구선수의 생활을 할 수 있었다.

흰 색 바탕에 검정 스트라이프로 디자인된 서울팀의 LG트윈스 유니폼과 이를 입고 뛰는 선수들이 너무 멋있게 보였다. 무엇보다도 그들이 하는 '야구'가 좋았다. 물론 야구선수라고 매일 야구 경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훈련 첫날부터 뼈저리게 경험했지만 그래도 불가능에서 가능으로, 꿈을 위해 뭔가를 할 수 있다는 것이 행복했다. 한국프로야구 선수가 되고 싶었다.

중학교 1학년에 진학했고 그 무렵 박찬호 선수가 메이저리거로서 LA 다저스에서 승전보를 전해주기 시작했다.

처음엔 동네야구와 다를 거 없어보였던 미국선수들의 타격 폼, 수비 폼 등이 우습게(?) 느껴지기도 했는데 점차 그들의 수준높은 야구가 보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꿈이 바뀌었다. 한국프로야구 선수가 되는 것에서 메이저리거가 되는 것으로.

이후 김병현 선수들을 포함해서 서재응, 최희섭, 김선우, 조진호 등등의 투타 부문에서 여러 한국선수들이 마이너리그의 긴 터널을 뚫고 메이저리그에 데뷔했다. 그 무렵 야구부의 한 코치님이 각 선수들마다 꿈이 뭐냐고 물었다. 아마도 동기부여를 위한 질문인것 같았다. 그 때 나는 연봉 500만 달러를 받는 메이저리거가 되고 싶다고 했다. 그 자리의 많은 야구부 동기들과 후배들이 터무니 없다는 표정을 지었지만 나에게는 그런 꿈이 있었다. 그리고 그 꿈을 위해 달려갈 수 있던 그 시간이 좋았고 그 꿈을 가지게 만들어준 박찬호, 김병현 등등의 미지의 세계에 발을 내딛고 도전했던, 선구자적인 선수들을 선망했다.

그 시점엔 한국야구의 수준이 어느 정도인지, 아니 한국에 프로야구 팀이 있는지도 모르는 미국 사람들이 많았다는 것을 신문기사를 통해, 뉴스 현지 인터뷰 등을 통해 보았는데 올림픽, WBC 등을 통해서 이제는 한국야구의 수준이 높다는 것을 많은 사람들이 알게 된 것같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개인적인 시각에서) 한국야구의 확장성이 떨어지는 측면이 있는 것같아 아쉬움이 있다.

물론 기존보다는 KBO 총재로 허구연씨가 추대된 이후 인프라, KBO리그의 흥행 등의 측면에서 상당한 발전이 되었다. 중요한 부분은 KBO가 내수시장으로서만 국한할 것인가 하는 것이다.

MLB, NBA가 수준 높은 리그로 설 수 있었던 여러 이유 중의 하나로 개인적으로는 '세계화' 큰 요소 중의 하나라고 생각한다. 물론 미국 국내로서는 NFL이 MLB, NBA 리그를 합친 것보다도 더 많은 수익을 창출한다고 한다. 그러나 NFL이 MLB나 NBA만큼 세계인의 사랑을 받지는 못한다. 이것은 결국 확장성이라고 생각한다.

500만 달러 연봉을 받는 메이저리거, 아니 그보다 지명받지 못하더라도 미국 마이너리그 팀에 찾아가서 테스트라도 받겠다는 생각을 했던 중학생은 IMF의 충격이 대한민국을 덮치던 시기에 부상과 부모님의 사업의 어려움으로 그 꿈을 접을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2025년 지금 나이 마흔을 넘긴 대한민국의 평범한 직장인이자 한 가정의 가장이자 야구를 좋아하는 한 팬으로서 살아가고 있다. 그리고 단일 시즌 천만관중을 돌파하는 리그가 있는 대한민국의 야구가 더 발전했으면 하는 바람을 가지는 한 사람으로 서있다.

누구나 '무리'라고, '불가능'이라고 얘기하던 것을 내가 뒤집을 수 있다고 노력을 통해서 운동장에서 증명할 수 있던 시간이 있었지만, 그래서 행복하기도 했지만 지금은 '무리'라고, '불가능'이라고, '쓸데없는 생각'이라고 얘기하는 것에 내 자신의 의견을 '증명'할 수 있는 능력은 없어 아쉽다. 그러나 어찌되었든 얘기를 해서, 계란으로 바위치기라도 그 자체가 긍정적인 의미가 있다면 좋지 않을까하는 생각으로 몇 가지 생각을 나눌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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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여러 야구 독립리그 중 손꼽히는 리그이자 MLB 파트너로서 긴밀히 협력하는 FRONTIER LEAGUE에서 2025년도 TRYOUT 일정을 발표했습니다. 매년 개최된 트라이아웃은 올해로 32번째를 맞이하게 되며 2025년04월22일(화요일)부터 23일(수요일) 이틀간 진행된다고 합니다.

Frontier League에 소속된 18개 팀의 매니저와 타 독립리그 스카우트 및 MLB 스카우트 또한 참가한다고 합니다. 자세한 일정과 장소는 아래와 같습니다.
 
장소 : Ozinga Field - 14011 Kenton Avenue Crestwood, IL 60445 United States
일정 : 2025-04-22 ~ 2025-04-23
         - Workout : 04/22 (AM 09:00부터) 
         - Simulated Game : 04/23   
자격 : 최소 18세 이상.
         * 대학진학 자격이 남아있는 선수는 등록 전, 학교 담당자에게 규정 준수여부에 대해 문의 필요.
참가비 : 투수 - $75 / 타자 - $100
주의사항 : Ozinga Field는 인조잔디 구장으로 금속 스파이크는 허용되지 않습니다. 야구공은 Frontier League에서 제공하며, 선수는 배트, 헬멧, 포수 장비, 유니폼 등 야구 장비를 직접 가져와야 합니다.

Ref.] 
- FRONTIER LEAGUE : https://linkednest.net/profile/league/view/01010000/12
- TRYOUT 정보 : https://www.frontierleague.com/sports/bsb/2023-24/releases/20250120m1mi3u
- TRYOUT 등록 링크 : https://www.eventbrite.com/e/2025-frontier-league-tryout-camp-and-draft-tickets-1146728518869?aff=oddtdtcreat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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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 USPBL Spring Open Tryout


United Shore Professional Baseball League ( USPBL ) 는 2025년 시즌을 위한 OPEN TRYOUT을 아래 일정으로 실시한다고 공지했습니다. 

2025-04-29(화) Check In
2025-04-30(수) Indoor Testing
2025-05-01(목) Outdoor Testing
2025-05-02(금) Simulated Game


OPEN TRYOUT 신청서는 아래 USPBL 사이트를 통해 작성/지원할 수 있으며,
자세한 문의는 [email protected] 메일을 통해 문의할 수 있습니다.

추가 내용 : 
외국인 선수의 경우 Employment Eligibility Verification(고용 허가 증명서) 을 작성할 수 있는 경우에만 USPBL리그에서 영입이 가능함. 지원 희망하는 선수들은 아래 내용을 참고하여 본인이 트라이아웃에 지원 가능한지 여부를 먼저 확인해야 함.

Employment Eligibility Verification(고용 허가 증명서)를 작성할 수 있는 경우는 아래  내용을 참고할 수 있다. 
Description : Employees may present one selection from List A
or a combination of one selection from List B and one selection from List 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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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게시글 테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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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f.] Node와 Pod와 Container


Container(컨테이너)란?

  • Application 구성 요소 하나를 실행하는 가상화된 환경.
  • Kubernetes에서는
    • 사용자가 Container를 직접 다루지 않는다.
    • Container는 Pod에 속하게 되고
    • Pod는 Container를 관리한다.

Pod(파드)란?

  • Kubernetes의 기본 단위.
  • Cluster를 이루는 노드 중 하나에서 실행.
  • 일반적으로 Pod 하나는 Container 하나를 포함(1:1).
  • 설정에 따라 1 Pod에 여러 Container가 존재할 수 있다(1:N).
  • 하나의 Pod에 포함된 모든 Container는 동일한 가상 환경에 포함을 의미.
    • 같은 네트워크를 공유하고, localhost로 서로 통신이 가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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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Docker Desktop에서 Kubernetes 기능 활성화


1.1. 우측 상단의 톱니바퀴 아이콘 클릭



1.2. 좌측 메뉴의 ‘kubernetes’ 선택 후, ‘Enable Kubernetes’ 체크박스 선택

  • Docker Desktop이 자체적으로 kubernetes를 내려받아 단일 노드 클러스터(Single Node Cluster)를 실행한다.

1.3. ‘Reset Kubernetes Cluster’ 버튼 클릭

  • Kubernetes Cluster에서 모든 Application, Resource가 제거되고 초기 상태로 reset된다.

1.4. 우측 하단의 ‘Apply & Restart’ 버튼 클릭

1.5. 정상적으로 완료되었다면 화면 좌측 하단의 docker, kubernetes 아이콘 박스가 초록색으로 나타난다. (만약 kubernetes 아이콘 박스가 빨간색으로 나타나면 1.3.을 다시 실행 후 아이콘 박스를 확인해본다.)


Ref.] 리눅스 OS 환경을 사용 중인 경우, 단일 노드 클러스터를 실행할 수 있는 방법
  • K3S (K8S 대비 절반 정도의 용량을 차지)
  • Kind(Kubernetes IN Docker)
  • Minikube


2. 생성된 클러스터 확인

C:\\Users>kubectl get nodes
NAME             STATUS   ROLES           AGE    VERSION
docker-desktop   Ready    control-plane   7m3s   v1.27.2

클러스터를 구성하는 노드의 기본 정보가 위와 같이 출력된다.

클러스터의 상태(status)가 ‘Ready’이면 정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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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의 차이에서 오는 오해

내가 속한 개발팀은 나 포함 5명이다. 현재는 나만 한국사람, 그리고 나머지는 대만 멤버들이다. 앞서 말했듯이 나는 한국에서 정식으로 토익시험 한번 보지도 않은, 모의시험조차도 한번 보고 점수는 신발사이즈처럼 나왔다. 물론 아예 영어를 못하는 건 아니지만 브로큰 잉글리시를 벗어나지 않는다. 중국어도 마찬가지다. 싱바커(스타벅스)에 가서 커피 한잔 사먹을 정도의 것밖에 되지 않는다. 그래서 직접 의사소통응 하고 팀장으로서 팀원에게 업무분배 및 지시를 할 때가 생기면 무척 애를 먹는다. 많은 경우, 통역을 해줄 수 있는 직원의 도움을 받지만 항상 도움을 받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아예 말을 안하고 진행할 수는 없어 급한 경우에는 직접 전하게 되는데 이 때 발생하는 것이 서로 사용하는 외국어가 제한적이다보니 오해가 발생하는 경우, 제대로 내용이 전달되지 않아 애를 먹는 경우가 있다. 그래서 나중에 중간 체크를 하는 경우 애를 먹는 경우가 있다. 내가 서투른 중국어와 영어를 사용하고 멤버가 역시 서투른 영어를 사용하면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보다 더 큰 괴리감은 업무 문화의 차이다.
 
한국의 빨리빨리문화와 너무도 다른 대만의 업무 문화

2018년 9월 중순부터 회사에 합류하자마자 클라이언트 회사와의 연동을 위한 개발을 진행해야 하는 업무이슈가 있었다. 내가 속한 회사의 서비스에서 oAuth 인증 등의 API 를 제공해야 하는 이슈가 있었고 일정이 빠듯해서 합류하자마자 매일 야근을 하며 일을 했다. 그러는 중, 어느 날 팀원 한 명이 내 눈이 빨갛게 충혈되었다고 ㅇ얘기해주면서 걱정되는 표정으로 한 마디를 나에게 더 건냈다. “ jinwon, 너무 열심히 하지 않아도 돼. 일을 다 끝내지 못하면 연장될거야. 너무 애쓰지 마” 그 한마디가 그 때 참 어떻게 해석해야 될 지...라는 생각을 가지게 만들었다. 걱정해서 그런 얘기를 해주는 것은 고맙게 생각했다. 그리고 내가 팀장이 아닌, 같은 팀원 입장이었기 때문에 존 더 쉽게 그런 얘기를 해주었던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내가 경험해왔던 업무문화, 동료의 사고가 판이하게 달랐기 때문에 어떻게 해석을 해야되나 혼란스럽기도 했다. 그 때 회사의 입장도 멤버가 무리하면서 진행하는 것을 지양하는 편이었찌만 불가피하게 일정을 맞춰야 하는 경우에는 야근이 불가피했다. 이 문화가 내가 팀장역할을 맡게 된 후 자주 어려움에 직면하게 되는 요소가 되었고 지금도 어떻게 하면 멤버들에게 업무와 일정을 이해시키고 동기부여를 하게 만들 수 있을지 고민이 되는 부분이다.
 
업무에 대한 적극성의 차이

또 다른 어려움은 멤버들과 팀장간의 적극성의 괴리감이다. 이는 의사소통의 어려움중 하나이기도 한데 어떤 업무에 대해 지시를 하면 물어보기 전까지는 피드백이 없는 경우가 많았다. 일반적이라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지만 업무 중 이슈가 있어도 보고를 하지 않는 경우도 있었다. 그러다 서비스 오픈 시점이 임박했을 때 여전히 업무가 많이 남아있어 (사실 제자리 상태인 경우도 종종 있다.)직접 야근하면서 처리를 한 경우도 자주 있엇다. 분명 얘기할 때는 이해했다고 했는데, 팀장이 팀원에게 중간에 이슈가 있으면 얘기하라고 했는데 그러지 않는 것이다. 회사마다 다소 차이는 있겠지만 내가 속한 회사에서는 상하관계 문화가 강하지 않은 편이었다. 그래서 칼퇴문화도 자연스럽고 경직된 분위기는 한국에 비해 훨씬 덜한 편이다. 최근 몇 년전부터 뜨거운 인기 키워드인 워라벨을 향유할 수 있는 곳이라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닐 것 같다. 칼퇴 문화와 한국보다 전반적인 분위기가 한국보다는 덜 타이트하다는 점은 분명 좋은 점이다. 그러나 ( 앞서 말했던 케이스와 같이) 업무의 마감일이 분명 존재하지만 그게 지켜지지 않았을 때의 당황스러움은 리더의 몫으로 돌아오게 되어 어려움을 겪게 만든다. 이러한 요인이 이따금 생각의 오해를 불러일으키게 만드는데 팀원들이 리더를 리더로서 인정하지 않는 것인가, 무시하는 것인가 라는 생각을 갖게끔되는 씨앗이 된다. 그리고 이는 관계의 어려움으로까지 이어지는 것을 경험하면서 분명 서로 다른 국가, 서로 다른 민족으로서 서로를 이해하고 가까워지는데에 상당히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핖수불가결하다는 것임을 느끼게 된다. 
 
그리고 시니어 레벨이라고 판단되는 친구들이라고 하더라도 자신의 의견을 먼저 말하지 않고 리더가 구체적인 업무의 틀을 얘기하기 전까지 움직이지 않는 경우도 있다. 구체적으로 상세히 이 업무를 어떤 방식으로 처리해야 할지에 대한 방법자체를 얘기해줘야 일하는 경우도 있는 것이다. 아예 생각을 하지 않는 경우보다는, 자신의 의견과 팀장의 생각이 일치하는지 확인받고 싶어하는 경우가 많았던 것같다. 그렇게 해도 자신은 팀장이 제시한 방법이 납득되는 방법이 아닌 것같다고 우기는 경우도 있었다. 
회사 대표님이 추구하는 방향은 “의사소통은 수평적으로, 업무는 수직적으로”였다.
언뜻보면 멤버들도 그렇게 생각하는 것처럼 생각되었지만 아예 자신의 얘기를 하지는 않는 부분에서는 이상적인 방향과는 차이가 있었던 것같다. 
 
말하고자 하는 바는 나조차도 낮선땅에서 일을 시작할 때 그 나라의 분위기, 스타일, 문화에 적응하려고 노력하자라고 생각했지만 실제로는 큰 괴리감을 느꼈듯이 진출하려고 하는 나라의 문화, 특히 근로 문화 및 스타일을 알려고 노력하고 또 적응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는다면 이상과 현실사이에서 오는 괴리감으로 인해 정신적으로 어려움을 겪을 수 있다.
 
여행과 생활은 달라요

이전에 여행 그리고 단기선교로 왔을 때 느꼈던 대만 사람들은 친절하고 타인에게 불편을 끼치는 것을 극도로 싫어하는, 완벽주의적인 성향이 많았다. 그러나 실제 생활하고 회사내 업무를 해나가면서 느끼는 것은 그것과는 다른 것이었다. 우리는 어느 나라를 여행하거나 TV 너머로 해당 국가의 특정 도시를 보면서 환상을 갖게 되는 경우가 많다. 나도 버킷리스트 중의 하나였던 유럽여행을 시도하면서 단 하나의 국가이긴,ㄴ 했지만 다녀왔던 오스트리아를 생각하면서 아.. 이 나라에서 생활하면 자주 빈슈타츠오퍼의 오페라, 오케스트라 연주를 볼 수 있겠지라는 생각을 한 적이 있었다. 한국과는 다른 여유로운 분위기, 청명한 하늘과 뭔지 모르지만 역사가 느껴지는 도시 곳곳의 분위기 등등. 여기서 살아보고 싶다라는 생각을 하고 아내에게 칭얼거린 적인 종종 있었다. 그러나 돌이켜보면 만약 생활한다면 불편함으로 다가왔을 내용이 역시 꾀 많았을 것 같다. 9시도 되기 전에 문을 닫는 식료품점과 식당들, 다소 비싼 식사 가격, 영어를 공용어로 사용하지만 다수의 경우 독일어를 하지 않으면 생활하기 어려운 상황들 등등. 여행에서 느꼈던 가벼운(?) 불편함들이 일상으로 다가왔을 때 전혀 다른 느낌으로 다가올 것은 굳이 말하지 않아도 이제는 많은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이 되지 않았나 생각한다.대만에 일주일 일정으로 오갈 때 세번씩은 꼭 먹었던 나의 ,사랑 우육면이 이제는 무심하게 지나쳐지는 것처럼 오스트리아를 갔다고 해도 음악을 좋아하기는 했지만 그곳에서 아이들을 키우며 그 나라 사람들과 익숙하지 않은 언어를 사용하며 이를 하는 일상은 어떨까 생각하면 마냥 행복하다고 애기할 수는 없을 것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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